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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 동지 추모 30주년에 부쳐

기사승인 201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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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 선배님!
마른장마 속에서 순창 들녘의 녹음은 짙어만 갑니다. 제가 선배 이름을 처음 만난 그 해 여름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폭염이 잔인하게 이어지던 날들이었지요. 94년 여름은 저에게도 고난이었습니다. 순창 농활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갑작스런 북녘 지도자의 죽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고대하던 민족의 염원은 물거품이 되고, 곧바로 공안의 칼바람이 몰아쳤습니다. 마침 입영을 거부한 저는 수배를 피해 8월 말경 순창에 잠시 내려왔지요. 새벽녘까지 낮의 열기가 가시지 않던 중앙로 인도 변 포장마차.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양채욱 형의 흐느낌 속에서 선배를 만났습니다.
선배처럼 농민해방을 염원하며 젊은 청춘을 농촌에 내던졌던 당시의 풍속도는 제게도 숙명처럼 다가왔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쌍치에서 농사짓던 이광희 형도 선배의 영전 앞에서 한 약속 때문에 순창에 내려오게 되었다더군요.

박경희 선배님!
선배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삼십 년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부둥켜안고 싶었을 이 땅은 여전히 꿈꾸던 세상이 아닙니다. 봄날 진달래 흐드러져 피어날 골짜기 지나 시련과도 같은 여름 뙤약볕도 견뎌내어, 가을 녘 풍년가를 부르자던 우리의 다짐과 약속을 아직 지켜내지 못했으니까요. 평생 땅을 일구고 장승처럼 농촌을 지켜온 농민은 주인자리를 내준 채 행랑채에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더욱 서글픈 것은, 수확의 손길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애물단지가 되어 밭이랑에 버려진 채 갈아엎어진 수많은 ‘양파들’입니다. 피땀으로 애지중지 키운 생때같은 농민의 자식들을 누가 고려장하듯 내팽개치는 걸까요.
선배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사람들도 변했습니다. 장가 못 갔던 농민회 청년들은 이젠 가정을 꾸리며 각자의 영역에서 각개전투 중입니다. 함께 술잔 기울일 기회도 드뭅니다. 전국적 수세싸움에서 선봉에 섰던 순창 농민운동 초창기 선배운동가들은 어느덧 70대 노인이 되었고요.

박경희 선배님!
그렇다고 희망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이제 바보처럼 고위 관리의 입만 쳐다보는 농민들이 아니니까요. 농민표를 위정자들에게 내맡기지 말자며, 농민이 직접 정치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지역의 농업정책도 농민 입맛에 맞게 바꾸고 있구요. 이젠 제법 각성되어 땅을 살려내는 환경 파수꾼으로서 역할도 해내며 농사짓습니다. 공공기관에는 건강한 친환경 농산물을 사용하도록 직접 발 벗고 나섰습니다. 새마을사업과 달리, 농촌의 마을도 주민들 스스로 변모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최근엔 유능한 귀농귀촌자들이 꾸준히 순창에 정착하면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영역에서 크고 작은 실험을 하고 있답니다.

박경희 선배님!
요즘은 선배가 살아내지 못한 시간을 감당하기엔 힘이 부칩니다. 젊은 날 뜨거운 심장은 어느덧 굳어가고, 차가운 머리는 취기에 마비돼 눈이 흐려졌습니다.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유연함을 핑계 삼아 휘어져 가는 건 아닌지, 일상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을 변호하느라 남루해져 버린 건 아닌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살고 있다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선배님! 20대 초상에서 한결같이 환하게 웃는 선배를 보면, 순창에 내려오며 다짐했던 젊은 날의 약속을 소환하게 되어 고통스럽습니다. 묘역을 향하는 발걸음이 해를 거듭할수록 무거워지는 이유입니다. 부끄럽지만 살아내야겠지요. 그게 산자의 몫이니까요. 부끄러움 한 다발과 추모가를 영전에 바칩니다. 선배님! 무심히 지켜봐 주십시오.

“저문 강 어둠속으로 그대는 그대는 / 노도 없이 등불도 없이 작은 배 저어갔네 /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했네 / 다시는 다시는 그 모습 볼 수가 없었네 / 그러나 문득 비울음속에서 그대 노래 들었네 / 날 위해 슬픈 노래 부르지 마라 눈물도 안된다고 / 메마른 땅에서도 생명을 키우는 땅의 사람들아 / 봄이면 어김없이 긴 어둠 박차고 / 파릇이 파릇이 움터 올라 푸른 하늘 보게 하라 / 푸른 하늘 보게 하라” (박경희 추모가/박찬숙 작사,작곡)

- 김효진(풍산 두지마을 이장)

김효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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