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초 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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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초 군말
  • 김효진 이장
  • 승인 2019.01.1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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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풍산 두지마을 이장

물끄러미 내다본 창문 밖 창공은 사막의 모래폭풍이 휘젓고 간 것 마냥 온통 잿빛이다. 이틀간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서 창문 열어 환기를 하지 못해 종일 머리가 띵하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는 요즘, 잦은 미세먼지 핑계 삼아 며칠을 두문불출하고 있다. 방학이라 집에 있는 아들 녀석에게 멍멍이, 닭 모이조차 맡기고 종일 누워 있다 보니 어깨와 허리가 배겨 아플 지경이다. 애들 눈치와 마누라 타박쯤이야 이젠 내성이 생겨 별 거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정초부터 게으름과 벗하고 지낸다.
누구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 나름의 의식치레와 마음가짐을 갖기 마련이다. 가족끼리, 혹은 직장동료나 지인과 송년회를 한다거나, 신년 맞이 등산을 한다든지 말이다. 개인사로 보면 담배를 끊어보겠다며 비장한 작심으로 삼일, 혹은 일주일을 보내기도 하고, 깨알 같은 하루 일정표를 한 줄 한 줄 계획하고 점검하기도 한다. 필자와 같은 농사꾼은 논 필지별 벼 종자를 선택하고, 밭고랑 수에 맞춰 어떤 작물을 심을지 고민할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올해는 좀체 결심이 서질 않는다. 해가 바뀌는 게 특별한 것이더냐, 호들갑 떨지 말라며 스스로 변호한다. 시간은 그저 매듭 없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것이지, 인위적으로 분절하고 도약할 이유가 있나 하고 말이다. 무력함의 징표다.
나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 중엔 갱년기를 겪는 거라 말해 주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란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며, 십대 때 사춘기를 안 거쳐서 뒤늦게 ‘지랄’떠는 거라는 이도 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드러나는 현상은 “관계의 단절”을 꿈꾼다는 것이다. 참 고약한 노릇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맺은 지인들뿐 아니라 가족이라는 그물망에서조차도 홀가분하게 분리 독립하고픈 망상에 사로잡힌다.
십대의 사춘기란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펼쳐질 수많은 갈래의 본격적인 관계를 앞두고, 적절히 버무려진 두려움과 기대감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시기랄 수 있다. 필자와 같은 사오십 대는 이제 그 관계 속에서 지치고 볼품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자신과 용기가 없어 관계 단절을 꿈꾸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주만유의 유의미한 하나의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한편으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위안이 될까.
종편 프로그램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란 프로그램이 있다. 오육십 대 뿐만 아니라 사십대마저 요즘은 산중의 삶을 꿈꾼다고 한다. 주인공들은 대체로 갑작스레 닥친 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사람관계가 헝클어져 산을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관계라 하면 인간관계만 고려하며 살던 세간의 인식을 뛰어넘어 만물과 새롭게 관계 맺는 이들의 깨달음은 신선하기도 하다.
치열한 전쟁터 같은 삶과 그 일상을 뛰어넘는 힘은 희망이라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그저 현실과 표리하는 관념어일 뿐이다. 여우같은 아내가 호랑이 되고, 토끼 같은 자식들도 득달같이 구는 ‘갠숙’으로 변할 쯤이면 이 모든 구성원들을 대체하거나 이내 근본부터 청산하고픈 마음이 앞서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바깥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이야 오죽 하겠는가.
가을들녘에 자운영 씨를 뿌려놓았다. 비료대신 거름으로 쓸 요량으로 뿌려놓은 것들이다. 살아있나 싶어 산책 나와 섬진강 둑방길 돌다 가끔 논에 들러 살펴보면, 떡잎만 내놓고 서릿발을 뒤집어쓴 채 냉동상태로 멈춰있다. 분명코 정월이 지나 해동하고 삼월이면 너른 들판을 자운영 꽃으로 수놓을 것을 알면서도 죽은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과학공상 영화에서처럼 우리도 가끔은 무엇을 잉태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냉동상태로 순간을 버텨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너절한 일상을 극복하고 ‘존재’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만유속의 나’처럼 여의어함도 함께 되찾길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존재 이유를 회복하는 길이 급선무다. 참 쉽지 않은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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