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남식이의 섬진강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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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남식이의 섬진강 편지
  • 김효진 이장
  • 승인 2018.12.1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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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풍산두지마을 이장

두 차례 여의도 국회 앞 1박2일 노숙투쟁을 마치고 돌아온 후로 허리가 뻐근하다 못해 주저앉게 생겼다. 집안에 종일 틀어박혀 누워 있다가 저녁 무렵에서야 동네 앞 강가로 나섰다.

두 해 째 파헤쳐져 보기 흉하던 유등파출소 앞 갱변. 어릴 적 빨래터가 있던 자리는 최근에서야 공원마냥 정비가 되어간다. 유풍교 다리를 건너자마자 외약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법 칼바람이 불어대는 둑방길. 논 내 나던 강물도 시릴 만큼 맑은 속내를 내보이며 굽이돌아 휘감다가, 이내 곧 잔잔하고 야트막한 돌바닥에 체 거르듯 흘러간다.
한여름 강물이 오그라들어 논바닥에 물 맛 뵈기가 그리 힘들었는데, 청둥오리가 자맥질을 할 만큼 제법 물살에 힘이 붙었다. 이 드넓은 논들은 언제 적부터 생겼을까. 수 만년 동안 섬진강이 범람을 거듭하며 강 가까이에는 모래땅이, 저 멀리 동네 앞 쪽에는 찰진 땅이 생겼을 게다. 우리 선조들이 수 십대를 나고 지며 갱변 가까이는 무시 시래기 심어먹고 진흙 뻘 수렁배미는 모내어서 나락농사 지으며 여태 살아왔겠지.
지긋지긋한 농사. 천업(天業)이 천업(賤業)이 되어버린 지금, 내 어쩌자고 농민회까지 연줄이 닿아 자라 잡고 물괴기 잡아먹으며 헛헛함 없이 살던 섬진강 낭만마저 강가에 냅다 던져버렸던고. 이 몹쓸 놈의 청승! 서울에 데모 한 번씩 다녀오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둑방길에 자전거도로가 나면서 난간을 세워대는 통에 그 많던 달맞이꽃들이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아래 강가 쪽으론 그래도 갈대가 제법 운치 있게 춤을 추어댄다. 오른편 들녘 쪽 내가 짓는 문중 논이 가까이 다가온다. 아련한 기억 너머로 트랙터가 논바닥을 빙빙 돌아댄다. 좁디좁은 트랙터 안에서 남식이는, 한쪽 무르팍에 앵리를 앉히고는 헤벌쭉 사람 좋은 웃음을 연방 지으며 로터리를 쳐댄다.
깨 팔러 나간 지 일곱 여덟 해가 되어간다. 남식이의 궁금증에 답이라도 하듯 캄보디아에서 가끔 문자회신이 온다. 깨 팔러 갈 때 쯤 딸이 생겼다는데 이름이 나영이란다. 배나영. 아무리 봐도 날 닮았는지 모르겠다. 손가락 날짜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발가락이 닮은듯하여 마음의 갈피를 못 잡겠다. 2년하고도 반년을 같이 산 앵리가 왜 곁을 떠났는지 남식이는 끝내 묻지 않았다. 달맞이꽃이 사라진 섬진강 둑방길에 이젠 앵리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대풍교에 못 미쳐 섬진강 본줄기와 합류하는 곳에 이르니 간간이 눈발이 날린다. 아침녘 물안개가 일품인 이곳 어디쯤엔가 두 살배기 남식이를 발견했다지. 빨래터 한쪽에 눕혀 놓아진 내가 이곳까지 반 십리는 떠내려 왔을 텐데, 그때 난 무섭지 않았을까.
“올해 지 나이가 오십인디, 아부지! 시째 남식이는 요즘 사는 거이 왜 이리도 심들고 무섭다요.”
오랫동안 산지기로 살았던 아버지는 왜 그리 일찍 가셨을까. 소재지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올 때조차 남식이네 산중 제각 집은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멀찌감치 떨어진 동네 동무들보다 빨래터와 갱변에서 노닐며 멱 감고 강과 어울렸을 남식이.
집 앞마당에 꼬까신 벗어놓듯 가지런히 신발 내려놓고, 무작정 갱변을 떠돌다 잠든 기억이 여름날이면 얼마나 많았던가. 뒤주굴 자라뫼 후배 녀석들의 잔소리도 이젠 낯 뜨거워 못할 짓이다.
남식이는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란 시를 좋아한다. 내년 여름날 저녁노을 질 무렵에도 이 시를 흥얼거리며 넉살 좋은 웃음으로 섬진강을 오갈 수 있을까. 
집을 나설 때는 강가로 인도하듯 재촉하며 등 뒤에서 불어 대던 강바람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칼바람 되어 얼굴을 예리하게 긁어댄다. 동지 상현달이 제법 부풀어 오르는걸 보니 보름이 며칠 안 남았나 보다. 남식이의 강물 속으로 한 해가 시나브로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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