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경지환/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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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경지환/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 정문섭 박사
  • 승인 2018.09.1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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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 나무 목 梗 인형 경 之 어조사 지 患 근심 환
정문섭이 풀어 쓴 중국의 고사성어 185

《사기》 맹상군(孟嘗君)열전에 나온다. 나무 인형의 근심이라는 뜻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 성어를 보면서 한 때 상관으로 모셨던 그 분이 생각났다. 애향심이 각별하셨던 그 분은 고향 옛집을 헐고 좀 넓은 기와집을 지어 고향마을 사람들과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며 여생을 보낸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셨다.
그러나 기와집이 거의 완공될 즈음,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알고 보니 지역의 한 브로커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을 동원하여 무리한 청탁을 하므로 마지못해 중앙요로를 통해 들어 줬으나 나중에 보니 여러 문제가 보여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그 자가 그 분의 약점을 잡고 ‘들어주지 않으면 세상에 알리겠다’며 끈질기게 늘어졌다. 결국 자존심이 많은 그 분이 그 협박에 견디지 못하고….
중앙에서 고위직을 지내신 분들 중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고향에 가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고향은 수십 년 전 동경해 마지않던 모습이 아니다. 도움을 주거나 반가워하기보다 그의 전관(前官)과 인맥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고, 듣도 보도 못한 수많은 애경사 봉투를 받느라 바쁘다. 그냥 쉬고자 하나 그렇게 놔두지 않는 것이다.
신선한 공기와 고향의 정취를 맛보며 고향사람들로부터 대우받으리라는 기대를 하며 금의환향하였는데, 그 분처럼 돌이킬 수 없는 화(禍)를 입고 만다면…, ‘목경지환’을 맞은 것이다.
맹상군은 전국시대 말 사군(四君, 四公子) 중 한 사람으로 식객들을 잘 대우하기로 유명하였다. *사공자 : 맹상군(孟嘗君), 조 평원군(平原君), 위 신릉군(信陵君), 초 춘신군(春申君)
맹상군의 아버지 전영(田嬰)은 제 위왕(威王)의 막내아들로 선왕(宣王)의 배다른 동생이다. 위왕 때부터 관직에 나갔고 선왕 때 여러 공을 세워 재상이 되었다. 선왕이 죽고 민왕(湣王) 때에 설(薛, 산동성 서남쪽)에 봉(封)해졌다. 그에게는 아들 40여명이 있었는데 그중 신분이 천한 첩 사이에 5월 5일 한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을 문(文)이라 했다. 그런데 ‘5월 5일에 태어난 아비를 죽인다’는 속설을 믿은 전영이 첩에게 아이를 버리라고 명했다. 그러나 문의 어머니가 몰래 키웠다. 성장한 후에야 문의 형제들이 주선하여 아비인 전영을 만나게 되었다. 전영이 첩을 다그쳤으나 문이 앞으로 나가 속설이 ‘이치와 도리에 맞지 않음’을 조리 있게 설명하니 전영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문이 장성하여 전영에게 ‘집안에 부(富)가 많이 쌓여 있으나 문하에 현인이 없음을 한탄하며 선비를 많이 둘 것’을 간곡히 건의하였다. 아들의 식견에 감탄한 전영이 가사를 떠맡기고 빈객들을 접대시켰다. 문이 귀천 구분을 두지 않고 천하 인재들을 모아 후대하였으므로 많은 제후들이 전영에게 문을 후사로 정하도록 청하므로 전영이 이를 승낙하였다. 전영이 죽은 후, 문은 설의 영주가 되고 마침내 맹상군으로 봉해졌다.
어느 날, 진 소왕이 맹상군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우선 동생인 경양군(涇陽君)을 제에 인질로 보내면서 맹상군을 진으로 오도록 초청했다. 맹상군이 이 초대에 응하려 하자 많은 식객들이 진에 가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간하였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때 소대(蘇代, 소진의 동생)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이곳으로 올 때 목우인(木偶人, 나무 인형)과 토우인(土偶人, 흙 인형)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우인이 ‘비가 오면 그대는 이제 곧 무너져 버릴 것이다’라고 말하니 토우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본래 흙에서 나왔으니 무너지면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하지만 그대는 비가 와서 떠내려가면 어디까지 갈 것이냐? 고, 지금 진나라는 호랑이와 같은 나라인데 군(君)께서 굳이 가시려 하고 있습니다. 가셨다가 만약 돌아오지 못하면 토우인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맹상군이 듣고 진에 가는 것을 단념했다.
소대는 이 우화에서 경양군을 토우인으로, 맹상군을 목우인으로 비유했다. 훗날 사람들은 목우인이 화(禍)를 당하면 본래의 나무로 돌아갈 수 없듯이, 본래 자기 모습을 잊고 함부로 행동해서는 돌이킬 수 없다는 말로 쓰기 시작했다. 또 타향에서 객사하여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에 진로를 고민했던 일, 50대의 중요한 순간에 확실치 않은 일에 매달리고, 좋은 추천을 받았으나 눈앞의 이익만 따져 따르지 않았던 일들이 후회된다. 그 당시 시의적절 하게 충고해 줄 소대와 같은 그런 멘토(mentor)가 없었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사실 내가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나의 한계였던 것이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엊그제만 해도 70세만 넘어도 호상(好喪)이라 했는데 이제는 90을 넘어 죽어도 서운하다고 한다. 살날이 아직 많이 남은 지금, ‘목경지환’의 길로 들어가려는 60대들이 보인다. 큰 아들 집 장만해 주느라 작은 놈 사업자금 대주느라 연금을 목돈으로 찾고 한 채뿐인 아파트마저 저당 잡히는 그 60대들 말이다.

글 : 정문섭 박사
     적성 고원 출신
     육군사관학교 31기
     중국농업대 박사
     전) 농식품부 고위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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