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보물여행(37) 꽃피는 봄에 다시 낙덕정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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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보물여행(37) 꽃피는 봄에 다시 낙덕정을 가다
  • 김태현 해설사
  • 승인 2018.04.1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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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순창보물여행’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니라” -유홍준

 

오늘 소개할 낙덕정(전북 문화재자료 제72호)은 <열린순창> 2017년 9월 21일자에 이미 다루어졌던 곳입니다. 낙덕정의 위치는 순창읍에서 복흥면 소재지로 가는 길 792번 국도, 낙덕저수지 전에 상송교를 지나 왼편 낮은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얼핏 보면 암벽과 소나무 숲이 울창한 동산으로 그 안에 위치한 정자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자가 위치한 상송(上松)마을은 예로부터 마을에 소나무가 많은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낙덕저수지의 물이 세차게 흐르는 추령천을 지나 그림에서 보는 54계단을 오르면 소나무 숲 안에 호젓하게 정자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솔잎이 오랜 기간 쌓이고 쌓여 돌계단을 벗어나 정자 주변을 걸으면 폭신한 촉감을 느낄 만큼 수 십 년 쌓인 솔잎의 흔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후손들에 의해 1900년에 세워졌으나 건립 당시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현재의 소나무들은 광복 후에 심어진 것들이라고 합니다.
낙덕정의 건축사적인 특징은 이전 기사에서 다루고 있으나 특이한 것들만 논해보겠습니다. 정자의 외관은 일반적인 사각 형태가 아닌 팔각지붕 형태로 외벽은 벽체가 아닌 문으로 만들어 8방의 문을 걸쇠에 걸어 올리면 사방이 트인 구조로 통풍과 조망을 특별히 신경 써서 설계된 것 같습니다. 여름에는 이곳에서 바람과 물소리를 벗 삼아 수학을 하였을 것입니다. 정자 중간에 다시 네 방향으로 문을 가진 방이 하나 있어 방과 외벽 사이에 공간을 두고 있습니다. 정자는 개방적인 구조를 가짐과 동시에, 추운 겨울에는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중간 공간을 두어 외풍을 차단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으며, 이에 추가하여 온돌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건물의 기둥은 원주의 화강암을 80cm정도 높이로 받치고 그 위에 나무기둥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처마를 이중으로 길게 뺀 며느리처마를 가지고 있고 8개의 추녀에는 팔괘를 그려 넣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정자의 건립 시기가 1894년 동학혁명 1895년 명성황후 시해 1897년 대한제국 선포 1898년 흥선대원군 서거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이 국운이 다해가는 시점이었고 서방과 일본의 국권침탈의 시도가 지속되던 1900년임을 감안하면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했던 선조들의 충정이 마음속에 느껴집니다. 
이곳 낙덕정을 거쳐 간 많은 인물이 있겠습니다만, 하서 김인후와 그로부터 400년 후의 인물인 가인 김병로를 꼽을 수 있을듯합니다. 1900년도에 하서 김인후의 후손들이 후에 훌륭한 인물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하니 과연 가인의 출현을 예언한 듯합니다. 다시 400년이 지나기 전에 이곳 낙덕정을 거쳐 간 순창의 어린 친구 중에 훌륭한 인물로 우뚝 서는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 봄에 다시 낙덕정을 찾았을 때도 여전히 푹신한 솔잎이 정자 주변에 지천이었고 겨울을 이겨낸 소나무들이 다시 싱그러운 초록을 띠기 시작하는데, 정자 바로 옆에 정자를 향해 누운 듯 기울어진 소나무가 수명을 다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인의 말년을 같이 하였을 어린 소나무가 그 수명을 다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웠고 동시에 다시 한 번 가인을 떠올려봅니다. 가인과 관련된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어 소개합니다.
가인은 귀국 후 대학에서 형법과 소송법을 가르치고 1919년 서른넷의 나이로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을 하였습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였는데, 법정에서는 조리가 있고 가장 열렬한 변론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피고인들이 마음에 독립을 품었다는 이유로 이들을 처벌하려면 조선인 전체를 처벌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변론을 하였다고 하니 서슬 퍼런 일제 강점기에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가인은 1960년 4ㆍ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된 후 대한민국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시행된 제5대 총선에 고향인 순창군에서 민의원 지역구로 출마했는데, 전국적인 지명도와 지역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위로 낙선을 하고 맙니다. 낙선한 이유는 벽보만 붙이고 선거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선거운동을 하지 않은 이유가 “어떻게 아랫사람들에게 표를 달라고 고개를 숙이나?”였다고 하네요. 법률가로서는 일제와 제왕적인 이승만 대통령에 반기를 들만큼 독립적이고 진보적이었으나, 사상적으로는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은 보수주의자로서의 가인 선생의 삶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에게는 매우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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